호주 이민의 환상과 현실 사이 ; 멜버른 18년, 벼랑 끝에서 대걸레를 쥐고 써 내려간 기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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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이민의 환상과 현실 사이 ; 멜버른 18년, 벼랑 끝에서 대걸레를 쥐고 써 내려간 기적의 기록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민 인생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미디어나 SNS 속 호주 이민 생활은 언제나 푸른 하늘, 드넓은 해변, 그리고 여유로운 바비큐 파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동경으로 이민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이민 생활 18년차인 저 역시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삶'의 현장은 냉혹한 법입니다. 그동안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 보고 이민 준비자들의 환상을 걷어내고, 호주 현지에서 직접 부딪히며 느낀 호주 이민 생활 모습을 솔직하게 공유해 드립니다.
이민을 오게 된 배경
1950년 6.25 전쟁을 격으신 아버님께서 항상 염려스러웠던 전쟁 재발의 위험을 피하고자 자녀 세대들은 평화로운 나라애서 지내기를 염원하셨었습니다. 제가 대학생때에 호주를 관광 갔다 오시고 난 후 저에게 호주가 안전한 나라이니 그 나라에 가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학생때 갑자기 낯선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이 좀 두렵기도 하고 선뜻 나서기도 그러하여 차일 피일 몇년을 미루다가 제 나이 44세 때 아버님의 염원과 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족과 함께 2008년 3월 23일 일요일에 호주 시드니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3시간정도 시간이 있어기에 시드니의 명물 오페라 하우스 구경하고서 바로 멜번행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멜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멜번을 선택한 이유
호주는 이민 점수제가 있기 때문에 나이, 학력, 경력, 영어 점수 등 각 부분에서 점수를 합산하여 합격 점수를 넘어야 이민 신청이 가능한데 그 당시 합산한 결과 영어 점수가 IELTS 7.0이 되어야 이민 신청이 가능했었습니다. 1점인지 2점인지 가 부족하여 고민을 많이 하던 차에 때마침 빅토리아 주에서 사업 투자를 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비지니스 투자 이민이 가능하였었습니다. 소위 163 비자라는 것이었는데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연구소 소장을 할 때 이어서 해당 조건이 충족되어 이민 신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빅토리아 주의 주도인 멜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민 준비 과정
이민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녹녹치 않았었습니다. 준비하여야 하는 입증 서류가 많았고 회사를 다니면서 회사에는 내색을 하지 못하니 더욱더 쉽지 않았었습니다. 중간에 제출된 서류도 반려되어 아찔 했던 적도 있었고 이민 승인이 언제 될지 모르니까 회사 일에 집중하지못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쨌든 마음 먹은 일이니 잘 되기를 기다려 보니 약 3년을 가디렸던것 같습니다. 오래 기다렸다가 이민 허락을 받으니 더 없이 기뻤으나 부모님을 두고 이민을 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대신에 163 이민 조건인 2년간 사업을 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빨리 해결하여 부모님을 호주로 모셔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갖고 최종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호주 이민 생활의 시작
한국에서는 나름 번듯한 IT 프로그래머이었고 관리자였습니다. 호주라는 새로운 땅에서 더 큰 미래를 그려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당당하게 사업 이민으로 멜버른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낯선 멜번땅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호주 이민을 도와 준 브로커, 집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로 머물렀던 한국인 가정집이 다이였습니다. 그나마 성당을 다니시는 분들이라 한국 성당에서 몇분 더 뵙게되었지만 무엇을 상의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현지 적응을 위해 이민자 영어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거기서 본 여러 나라에서 온 같은 처지의 이민자들이 오히려 이야기 상대로는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리둥절 할 때 호주 이민을 도와 준 브로커 분이 호주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상의를 하던 차에 자기네 회사에 투자를 하고 영주권 받는 것을 도와 주겠다 하여 말만 듣고 공동 사업을 시작하였었습니다. 한국 사람이었기에 더 믿었던 것인데 이 첫발이 후에 큰 실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체 뭐라도 해야 겠기에 막무가내로 일을 시작하였었습니다.
호주 사업의 첫 발
처음에는 뭐라도 한다는것이 어떤 두려움을 없앨 수가 있었기에 서스름없이 따라 나서고 일도 같이 하고 도와도 주고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착각을 하였을 정도 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다른게 있다고 느껴지면서 뭔가가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주권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 진행이 되었을때 얻을 수 있는 결과이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명확히 서류로 해 놓은 것 없이 그냥 말로다 하다보니 뭔가를 입증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사업 투자 취소 요청을 하였으나 이미 지불된 금액을 돌려 줄 수 없다는 청청벽력 같은 말만 되풀이 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금액을 돌려 받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봤지만 말로만 돌려 주겠다는 것이지 행동이 없어서 결국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돈은 약 10년 쯤 될 때 우여 곡절 끝에 호주가 아닌 한국에서 재판을 하여 야 했었습니다. 이 10년간은 저에게는 끝없는 자책감으로 시달렸던 사건이었습니다. 지인이면서 한국 사람이라고 믿었던 첫 선택은 어이 없이 실패가 된 것입니다.
호주 두번째 사업
이미 투자금을 손실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 사업 자금으로 만들어서 두번째 사업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시티 한복판에서 유학원을 열고, 'Corean House'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며 호주 정착의 성공 신화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호주의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했습니다. 살인적인 인건비와 렌트비(월 $10,000),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낯선 비즈니스 환경 앞에서 IT 개발자 이었던 저의 도전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 사업으로 인해 영주권 취득을 위한 자격을 얻어야 하는데 2년간의 사업을 하고 영주권 신청에 이르렀습니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이민 법무사 비용을 아껴보겠다고 영주권 서류를 직접 준비해 이민성에 제출했던 것이 뼈아픈 화근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서류 누락으로 10일간 경영을 안했다는 이유로 영주권은 무참히 거절되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한국인 변호사를 고용해 이의 신청을 진행했지만, 저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그 전문가에게마저 끔찍한 배신을 당했습니다. 나를 호주로 이끌어준 동족에게 당한 그 깊은 배신감은 두번째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환멸로 이어졌습니다.
영주권 취득 실패로 그동안 비용 손실이 많이 보았고 추가로 이민 관련 재판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식당 사업마저 원할하지 않아 통장 잔고는 거의 0원이 되었습니다. 당장 다음 달 렌트비조차 낼 수 없어 거리에 나앉을 위기였습니다.
가장 잔인했던 시련: 믿었던 동족, 전문가들의 배신
언어의 장벽과 낯선 문화 속에서 이민자가 가장 먼저 의지하게 되는 것은 결국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입니다. 하지만 제 호주 생활 18년 중 가장 깊은 절망의 늪으로 저를 밀어 넣은 것은 낯선 호주인이 아니라, 가장 굳게 믿었던 동족이었습니다.
저의 호주 이민 첫걸음을 도왔던 이민 법무사,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저를 대변해 주어야 할 한국인 변호사. 호주 사회에서 가장 엘리트이자 전문가라고 믿었던 그 두 사람에게 연달아 사기를 당했습니다. IT 프로그래머 시절의 경력이 무용지물이 되고 'Corean House' 식당이 무너졌을 때의 타격도 컸지만, 나를 호주로 이끌어준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은 제 영혼마저 갉아먹는 듯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결국 한국인들끼리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만 살아남는 곳이 이민 사회인가?'
인간에 대한 철저한 환멸이 밀려왔고, 호주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민 사회에서는 '한국인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뼈아픈 농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죠. 제 인생에 가장 어둡고 처절했던 시기였습니다.
💡 18년 차의 뼈아픈 경고: 이민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전문가의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같은 한국말을 쓴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지 마세요. 계약서 한 장, 서류 한 줄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호주 정부의 공식 기관을 통해 교차 검증하는 것만이 이 냉혹한 이민 사회에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닥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유일한 원동력
사업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내 자리가 없다는 뼈저린 외로움과 비참하고 어두웠던 시기. 벼랑 끝에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대단한 희망이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낯선 호주 땅에서 나만 믿고 따라온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 우리 다섯 식구가 어떻게든 이곳에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이 저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의 호주 생활도 무너진다는 그 절박함이 저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닻이 되었습니다.
18년이 지나 글렌 웨벌리에서 살면서 그때를 돌아보면, 영주권이라는 종이 한 장보다 더 큰 호주 정착의 무기는 결국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치열함이었습니다.
기적처럼 다가온 $1,200
사업 실패와 믿었던 동족의 배신으로 통장 잔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당장 다음 달 렌트비를 내고 나면 수중에는 단 한 푼도 남지 않는, 그야말로 벼랑 끝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원망과 호주 사회에 대한 환멸로 매일 밤 소리 없는 눈물을 삼키던 그때였습니다.
기적은 가장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제 딱한 사정을 우연히 전해 들은 큰아들 친구의 부모님이, 렌트비에 보태 쓰라며 선뜻 $1,200이라는 큰돈을 건네주신 겁니다. 피를 나눈 가족도, 제가 수임료를 쥐여주며 믿었던 전문가들도 철저히 저를 짓밟았던 이 낯선 땅에서,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준 그 따뜻한 마음에 짐승처럼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 $1,200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동병상린이라고나 할까! 먼저 자리를 잡은 같은 이민자 출신 아시안 가정이 제게 준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내라'는 생명줄이자 호주가 제게 건넨 마지막 위로였습니다.
그 응원에 힘입어 저는 남아있던 알량한 자존심마저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IT 프로그래머, 시티 한식당 사장이라는 과거의 화려했던 꼬리표를 전부 찢어버렸습니다.
가장 뼈아팠던 "내 자리가 없다는 비참함"
한국에서는 나름 번듯한 IT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전문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호주 땅에 떨어지니 저는 그저 '로컬 경력이 없고 영어가 서툰 이방인'일 뿐이더군요. 수백 군데 이력서를 넣어도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거절뿐이었습니다.
결국,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무게에 전공과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청소 일이라도 하자'며 청소 업체에 문을 두드렸죠.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호주 내 청소 경력이 없어서 채용할 수 없다"는 황당하고도 절망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프로그래머였던 내가 청소 일마저 거절당했을 때, 텅 빈 거리에 서서 느꼈던 그 지독한 무력감과 비참함.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그냥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었습니다. 이민의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했고, 더욱이 영주권이 없다는 현실은 더욱 가혹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서 쌓아온 전문 지식과 경력이 호주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허탈함, 그리고 생계를 위해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지원한 청소 일자리에서마저 '경력 부족'으로 거절당했을 때의 그 비참함과 막막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청소부로서의 첫걸음
경력이 없어 일자리 구하기 힘들 때이었지만 결국 수소문 끝에 마침내 어렵게 구한 저의 진짜 호주 첫 직장은, 근처 공립 고등학교 복도를 하루 2시간씩 쓰는 청소 일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퇴근한 텅 빈 고등학교 복도에서 빗자루와 대걸레를 쥐며, 저는 비로소 호주 청소부로서의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몸은 고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하루 2시간짜리 노동이었지만, 내 가족을 내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정직한 땀방울이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제 인생에서 가장 눈물겹고 숭고한 시간이었습니다. 일당 $24 이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영주권이 없다는 꼬리표는 잔인했습니다. 같은 청소 일을 하면서도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부당한 대우와 불이익을 묵묵히 감수해야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어 복도를 닦으며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이 때 기적이 생겼습니다. 학교 관리를 하던 청소 관리자가 일을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서 그 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같은 학교에서 청소도 하고 관리도 하게되어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는 망설여야할 더 이유가 필요 없었습니다. 무조건 해야 했고 2년 정도를 더 일하게 되어서 드디어 경력을 쌓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8년의 기다림, 추방 명령,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적
호주 이민자의 속담으로 호주에서 얻은 첫 직장이 결국 직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력을 쌓으면서 청소일로 버티던 6년째 되던 해 아버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그토록 호주에서 노후를 보내시려고 바라셨는데 저의 실 수로 기간이 오래 걸려서 아버님이 기다리 실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에 멍이 들었습니다. 그뿐아니라 3개월마다 시티에 있는 이민성에 방문해서 새로 받아야하는 임시 브리징 비자 상태이었기때문에 호주 밖을 나가는 순간 기다린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라서 한국에 가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 죄스러움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할 것입니다. 그동안 법정에 상고도 하고 이민 장관 타원을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 이민 온지 8년째 되던 해에 이민성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추방(Deportation)' 통보 메일이 날아왔습니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는 포기하는 대신 평소 다니던 지역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부님과 로컬 성당 및 한국 커뮤니티의 수많은 교우분이 마치 본인 가족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지역 국회의원(MP)까지 만나 간절한 상황을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추방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 거짓말처럼 기적적으로 영주권 승인 레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 하나님이 친히 베풀어 주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적이었습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그 8년의 캄캄한 터널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내 버텨낼 수 있었던 유일한 원동력은 결국 '가족'이었습니다. 영주권도 없는 저를 믿고 묵묵히 견뎌준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었습니다.
글렌 웨벌리에서 18년을 살아낸 지금,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영주권이라는 종이 한 장보다 더 위대한 것은 숱한 시련과 배신 속에서도 절대 손을 놓지 않았던 가족의 힘, 그리고 벼랑 끝의 저를 끌어안아 준 이웃들의 숭고한 연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글을 맺으면서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이민 역사이었는데 이민 결정을 하는데에 도움이 좀 되셨나 모르겠네요. 영주권은 가급적 받아서 오셔야 하고, 혹 비지니스 거래 관계가 있다면 공증된 서류, 이메일,SNS 등 자료를 남겨야 한다는 점, 같은 말 한다고 동족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영어 문화권이니 영어를 쓰는 아시안 나라 출신의 전문직들이 표현을 더 잘한다는 것 등을 염두해 두시면 제가 겪은 경험에 비추어 보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처음 호주 땅에 발을 디디며 가족이 함께 나누었던 그 절박했던 약속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영주권이라는 종이 한 장보다 더 위대한 것은, 숱한 시련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여러분과 가족들의 단단해진 마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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